본문 바로가기

영양분/읽은 책 필사

브릴리언트

반응형

브릴리언트


0. 빛나는 생각에 앞서


안다는 것, 모른다는 것,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라.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모른다거나 틀렸다거나 하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배우려 하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 없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배우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을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더욱 더 큰 생각의 실마리를 만들고 연결하는데 써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은 '이해'의 출발점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많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반드시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해한 대로 행동하고, 생각해내고, 또 행동하고, 그리고 또 생각해내고....."


'이해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자기 것처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아는 프레임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는 것'처럼 이성속의 시냅스를 따라 저 먼 저장소에 가둬진 기억의 일부가 되어서는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빛나는 생각'을 만들 수 없다는 의미이다.



1. 오감,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다섯가지 감각을 통해서 세상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보는 감각을 발달시키지 못하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오감을 발달 시켜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현명해 질 수 있다.


오감을 암흑으로부터 탈출시켜라.

나는 나를 본 적이 없다. 단지 본 적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본 것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즉 환상일 뿐이다. 좌우가 뒤바뀐, 그것도 실체가 아닌 비친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눈을 뜨고 키스해 본적이 있는가? 눈을 감고 하는 키스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눈을 감는 이유는 명쾌하다. 시각을 닫는 것이다. 그래야 촉각과 미각이 눈을 뜨기 때문이다.

한미디로 오감을 정의하면 '세계를 인지하는 창'이다.

이 창을 통해 세계를 알게 된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감각을 움직이고 해석하는 정신이다. 오감을 발달시키는 첫 시작은 정신에서 시작된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않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와 같은 상태로 자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 이유가 있고,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기 위해서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읽어 내는 첫 번째 도구가 오감이다. 그 오감을 암흑 속에 가두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오감을 발달시키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딱 한 가지다.

그냥 보지 않는것이다. 이것은 그냥 듣지 않는 것이며, 그냥 느끼지 않는 것이며, 그냥 맛보지 않는 것이며, 그냥 냄새 맡지 않는 것이다.


ex) 친구의 하소연

우리는 힘든 일이 있는 친구의 하소연을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않고' 충고한다.

단 한 번도 그 친구의 입장이 되어보거나 경청하지 않는다. 충고는 지금까지 그 친구가 알고 있는 해답이 아닌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친구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보라. 정말 그 친구가 어떤 심정인지, 친구의 입장이 되어 보려고 노력은 했는지도 생각해 보라. 그러고도 충고할 수 있는 일인지도 생각해 보라.


ex) 피아노 연주

피아노 연주자를 생각해 보자. 왜 피아노 연주자는 온몸으로 연주하는 것일까? 건반 터치 하나하나에 손가락이 아닌 온몸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눈을 감고 연주하는 것은 또 뭘까? 눈을 감는 것이 건반을 잘못 건드리거나 몸짓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 건반 터치에 방해되는 것은 아닐까? 연주자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의 피아노 연주는 소리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연주는 우리가 가진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피아노 소리는 들었지만, 연주는 듣지 못한 것이다. 건반으로부터 나오는 피아노 줄의 울림 소리, 연주자의 몸짓에 숨은 영혼의 소리, 땀 냄새에 숨은 열정의 소리, 전율처럼 밀려오는 느낌의 소리도 들어야 한다.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가수의 노래를 소리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듣기 때문이며, 감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ex) 음식의 맛

맛은 단순하게 혀가 느끼는 감각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형태이고, 코로 맡는 음식의 냄시이고, 씹히는 음식의 육질과 소리이며, 목 넘김의 느낌이다. 그리고 삼킨 이후의 행복까지도 맛의 일부다.


왜 보는 것은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같은 것을 다르게 인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다른 것을 같게 인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본다고 한다. 듣는 것을 '들어 본다'고 하고, 먹는 것을 '먹어 본다'고 한다. 심지어는 '느껴 본다', '냄새 맡아 본다'고 한다.

본다는 것은 세계를 내 속에 들여놓는 과정이며, 내가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은 이렇다.


1) 오감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ex) 사과를 상상해 보자.

이 사과의 색과 크기, 상상할 수 있는 맛과 향, 손에서의 촉감과 씹어 넘길 때의 느낌, 과즙이 입안에 퍼질 때의 기분 등


2) 받아들인 세계는 모두가 가진 '감성'이라는 해석의 통로를 거쳐 '이성'에 전달된다.

ex) "아, 저 푸른색이 가진 신맛. 그 맛은 약간 떫으면서도 입안에 가득 퍼지는 아삭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몸을 움츠러들게 하지."


3) '감성'으로 해석된 신호는 다시 '이성'에 전해져 그 세계에 대한 논리적 추론과 명령을 이끌어 낸다.

ex) "저 푸른 사과는 더는 쳐다 볼 가치가 없어. 이제 그만 돌아서야지"


그런데 같은 사람일지라도 오감에 개입하는 감성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내려질 수 있다.

ex)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때로는 시원해 보일 수도 있고, 우울할 때는 자신의 마음속에 흘러내리는 눈물로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오감이 인지하는 세계가 매번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매번 같은 것을 인지할 때마다 항상 같은 해석을 내리는 감성을 또한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사실 우리는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매일 앉아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책상 위에서 작은 메모리 스틱이나 지우개 하나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기억이 있지 않은가? 그것을 누군가가 "노트 옆에 있다"고 가르쳐 주고 지나갈 때, 이걸 왜 찾지 못했는지 자신의 눈을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가?


이제, 나의 일과 주변을 돌아보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들은 고요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냥 존재했던 것들이 있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라. 그리고 작은 것부터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 채워 보라. 책상에 앉은 이후 매일 울리는 전화벨 소리의 크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소리 크기를 3단계 밖에 조절할 수 없는 전화벨일지라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전화벨을 통해 내 색깔을 낼 방법도 찾아라. 좀 더 적극적으로 주변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라.



02. 이성, 과거에 숨은 미래


현재를 잘 판단하는 것이 곧 미래를 잘 대비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과 학습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


법칙을 깨려면 법칙에 능통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환경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인간이 경험하고 학습한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세계의 가장 큰 법칙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이 이와 관련된 것들이다. 


ex) 일본의 유토리교육 도입

2002년 일본은 유토리교육을 도입하였다. 지나친 입시 위주의 교육을 좀 더 창조적이고 자율적이며 여유로운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것이 창조성 발달은 커녕 기초학력 저하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2007년에 다시 학력강화교육으로 전환하였다. 


창조성은 아무것도 없거나 결핍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그 법칙에 능통해야 한다.



03. 감성, 끝없는 생각의 뉴런


오감을 예민해지도록 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오감을 예민하게 하는 방법?)

감성과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을 공부하고, 수 많은 상상을 통해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감성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들어있다.

미래학자 롤프 옌센은 '감성'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21세기 소비자들은 이성보다 감성적 요구를 바탕으로 구매 결정을 내린다.'고 하면서 우리가 창조해야 할 또 다른 목표가 '스토리와 꿈'이라고 강조한다.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사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성으로만 모든 것이 결정되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감성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핵심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의 감성적 디자인을 강조한 것은 그만큼 이성의 영역인 기능적인 부분에서도 획기적일 정도로 창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부족한 감성으로 창조물을 만들 수도 없지만, 감성이 빠진 창조물은 의미가 없다는 애기다.


인간의 욕구에 대해 매슬로우는 5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과 사랑의 욕구, 존중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은 자아실현의 욕구다. 각 단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의 네 가지가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마지막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다.

롤프 옌센의 설명이 바로 이것이다.

즉, 먹기 위해 사는 인간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스스로 존재감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먹는 것조차도 먹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 없겠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먹는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이며 그 자체도 꿈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ex) 아이폰용 케이스

애플의 아이폰용 케이스는 대부분 뒷면에 동그란 구멍이 뚫린 디자인을 채택한다.

왜 그럴까? 도대체 케이스를 사는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아니면 어떤 만족감을 주기 위해 케이스에 구멍을 낸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케이스를 장착한 사림이 '나는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동그란 구멍으로 아이폰 후면부에 있는, 한쪽을 베어 먹은 사과가 보이기 때문이다.



04. 언어와 이미지, 상상과 현실의 끈


언어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아무리 잘 전달하려고 애를 써도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에 생각이나 심상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하지만 언어가 불완전해서 우리는 창조적일 수 있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새로운 것이나 엉뚱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가 꿈을 꾸든, 골똘히 생각하든, 뭔가를 상상하든, 아니면 누군가에게 설명하든 그 재료는 언어와 이미지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사용하는 데 문제가 생기면 상상력은 그 언어와 이미지 속에 갇혀 버린다. 결국, 우리의 사고는 언어와 이미지로 하는 것이고, 그 언어와 이미지를 잘 사용하지 못하면 사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잘 상상한다는 것은 언어나 이미지를 잘 사용한다는 것과 같다.


나를 만드는 건 나의 언어다.

상상력을 키우는데 언어와 이미지가 왜 중요할까?

자신이 가진 언어나 이미지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이자 표현의 한계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한계는 곧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의 한계라는 의미다. 이것은 첫 번째 '갇힌다'의 의미다.


이렇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결과가 두 번째 '갇힌다'의 의미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언어 표현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을 더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표현한 자기 생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반추하지 않는다. 결국, 이 말은 자신의 표현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범주에 갇힌다는 의미다. 이런 문제는 자신의 표현을 받아 줄 상대가 생길 때 더 잘 나타난다. 상대가 생기면 자신의 표현 문제가 상대방의 이해 문제가 되고, 반대로 상대방의 표현에 대한 자신의 이해 문제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치아노 파바로티는 노래 연습을 어떻게 했을까?

누구나 어릴 적 노래 부르기 시험 전날 밤 이불 속에서 머릿속으로 계이름을 떠올리며 상상의 노래 연습을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파바로티도 그랬다. 

상상 속의 노래 연습 과정에서 수많은 청중의 반응도 떠올리고, 동시에 공연장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또한 상상했을 것이다. 파바로티는 이런 방법(형상화)으로 자신이 가진 언어와 이미지의 세계를 키웠다.

*형상화(이미지화)

형체 없는 것에 형체를 부여하는 것, 형체로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을 어떤 방법이나 매체를 통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상으로 나타냄.


언어와 이미지를 키우는 다른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핵심을 찾아내는 '추상화'가 있다.

추상화는 여러가지 복잡한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본질만을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ex) 엑스레이 촬영

이외에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환경에서 공통의 요소인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 그런 패턴을 스스로 구조화할 수 있는 능력, 입체를 구조화하는 입체화 능력과 같은 것들을 키워야 언어와 이미지의 세계가 커진다.


언어와 이미지를 키우는 방법 중에 이 둘을 동시에 연결해 키우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은 언어와 이미지를 비슷하게 사용하는 방법으로, 좌뇌가 갖춘 언어능력, 논리력, 추리력 등을 우뇌가 갖춘 시각적 능력, 직관력, 통합력과 혼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마인드 맵'과 같은 것들이 언어와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인드 맵은 말 그대로 생각을 지도처럼 그려낸 것으로, 유기적인 생각의 연결이 시간의 흐름이나 연상에 의해 계속되도록 사고를 구조화한 그림이다. 바꿔 말하면 마인드 맵은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하려면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언어로 사고하는 것이 곧 이미지로 사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는 소통의 도구이자 상상의 도구이다.

이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창조적인 사람,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 도구의 활용에서도 최고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더구나 이것은 창조성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4장(인간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구조와 그 원천) 정리

세계를 인식하는 오감, 이것을 경험과 학습으로 바꾸어 저장하는 이성, 감각적이고 통합적인 사고에 이르도록 사고의 차원을 키워주는 감성, 끝으로 오감과 이성과 감성이 교류하는 도구인 언어와 이미지. 

결론적으로 창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줄 아는 날카로운 오감, 엄청난 노력으로 쌓아올린 학습과 경험의 이성, 세밀하고 차원 높은 감성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창조성의 연결도구인 언어와 이미지를 키우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05. 본질, 보이지 않는 진실


모두가 믿고 있거나 믿는 것처럼 보이는 것하고 본질은 다를 수 있다.

지금은 맞지만 미래에는 틀릴 수도 있고, 과거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생각과 판단이 사실과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을 봐야 한다.


믿는 것과 본질은 다를 수 있다. 모두가 믿는 것 하고 실제는 다를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본질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대다수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것의 숨은 진실'이 본질이지, 그냥 보이는 껍데기가 본질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본질)을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 배워야 한다. '왜' 그런지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를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본질에는 '왜'라는 단어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왜'가 필요 없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추상은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을 제거하고 하나의 의미만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그래야만 원하는 한두 가지 본질을 볼 수 있다.


진실은 두꺼운 벽 뒤에 있다.

마르셀 뒤샹은 '어떤 것이 미술이고 어떤 것이 미술이 아나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에서 작품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일상적인 것들도 충분히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작품을 학습하는 것 또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뒤샹은 모든 것이 예술의 소재이고, 그 소재들이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 주는 또 다른 소재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앤디 워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 우리가 가장 하찮게 생각하는 것, 우리가 가장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새로운 본질을 찾아내는 방법을 보여 준 것이다.

패턴도 본질의 하나다. 이것은 언어나 이미지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지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인지되는 것이기도 하다.


본질은 모두가 믿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그 내면에 숨은 진실이 아니라 껍데기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당신들은 보고 있어도 보고 있지 않다. 단순히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은 놀라운 속성을 찾아라."고 말했다. 

미국 국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재니퍼 존스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보아야 할 본질을 보는 방법을 그의 작업에 빗대 이렇게 설명했다. "내 작업은 눈에 익숙한 것들을 내가 어떻게 보는지를 '보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렇든 본질을 보는 놀라운 눈을 가진 사람들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 모습을 보라고 충고한다. 이것은 그것을 더욱 그것답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가져야 할 눈이 그냥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갑자기 보이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본질을 보는 과정에는 수도 없는 질문이 또한 따라야 한다. 

'왜'라는 질문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래서'와 같은 의문들 말이다. 또한, 내 생각을 말하는 방법에서도 의견 이전에 나의 분석을 먼저 말해야 한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생각해 보자.

이 작품은 갑자기 본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뒤샹은 머이브릿지의 사진 작품이나 폴 리셰의 스케치를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 속에서 뒤샹은 움직임의 본질을 찾아냈고,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이 캔버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뒤샹이 그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가 예술로서의 그림인가, 아니면 분석으로서의 움직임의 과학인가? 둘 다다. 또한, 이 작품은 이후 움직임을 저장하여 보여주는 영화 산업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학문'을 영어로 표현하면 'Learning'이 되지만 'Science'로 표현하기도 한다.

두 단어를 합하면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것' 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학문과 과학은 좀 다른 의미가 있다.

'학문'은 감성적으로 인식된 세계를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재인식하는 것이지만, 

'과학'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론적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둔다.

그렇지만 두 단어는 하나의 의미로 통용된다. 

그럼 예술은 다른 것일까? 예술은 이렇게 습득된 감성적, 이성적 지식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과학은 개념으로 설명되지만, 예술은 미적 형상으로 표현된다. 결국, 이 둘은 하나의 뿌리를 가졌고, 그 표현의 방법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학문 세계를 주로 예술로 표현했을 뿐이고, 우리가 본 것은 그 표현일 뿐이다. 이것이 과학과 예술의 뿌리이자 본질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술가의 눈으로, 과학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가 지금까지 본 방법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이고, 그 방법이 오로지 하나이기 때문이다.



5장(본질) 정리

해석과 관련된 것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숨은 진실'을 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른 눈' 을 가져야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에 본질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상화 능력, 추상화 능력, 패턴을 읽는 능력, 다른 차원으로 그것을 재구조화할 수 있는 능력, 심지어는 그것이 되어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진실의 문이 열리고 본질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질은 하나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본질이 다차원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06. 색깔, 새로움의 존재 가치


나 다워지기 위해서는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야 하고, 그냥 배우고 남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실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잘 안되거나 실패를 맛보아도 계속 가야 한다. 그게 나의 꿈이고 나의 색깔이라면 자신의 평생을 걸고 계속 가야 한다.


또한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세 번째 행동이 계속된다는 것은 그냥 앞에 있는 것을 반복하는 것하고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를 쓰는 것이 달라야 한다.


창조는 색깔을 만드는 과정이다.

색깔을 낸다는 것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의미다.



색깔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첫 번째는 이성을 채우는 일이다.

이성은 주로 과거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가 배우는 철학, 과학, 수학, 언어와 같은 것들이고 이것은 아주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역사에 축적되어 온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재' 는 엄밀하게 따져보면 과거다. 이것을 우리는 이성에 축적하고 필요한 경우 현재와 미래를 위해 사용한다. 그 필요성 때문에 학습하고 또 학습하는 것이다. 이렇듯 앎의 지평이 넓어지면 이성적 판단이 잘못되는 경우를 최소화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인지했을 때 더 빠르게 이해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두 번째는 오감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오감은 단순한 훈련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도움을 받아야만 발달한다. 보고 있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하거나 앎에 다다를 수 있는 소지를 그것으로부터 제공받지 못한다면 인식의 단계에서부터 새로운 세계는 차단당한다. 오감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오감을 모두 사용해서 보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것을 이성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카워야 한다. 또한, 감성의 해석과 교류함으로써 인식된 세계의 미묘한 차이까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감은 일반적인 훈련으로는 빠르게 발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감은 모든 일상생활의 수준에서 철저하게 훈련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험실의 관찰로는 오감이 발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세 번째로는 감성을 키우는 일이다.

감성은 지각과 직접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지각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성 저편의 기억과도 관련이 있다. 감성은 다분히 우뇌의 영향을 받게 되고, 우뇌의 기억에 다시 저장되는 특성이 있다. 특별한 경우로, 우뇌가 좌뇌보다 집중적으로 발달함으로써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는 예가 있다. 이것을 '서번트 증후군' 이라고 한다.



영혼을 노래하는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는 자신의 색깔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라,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하라, 가능성이 있는 것에는 항상 도전하라."



6장(색깔) 정리

색깔은 '앞에서 배운 많은 것들을 왜 키워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색깔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며, 나의 존재 이유고, 삶의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곧 색깔은 '왜 나는 창조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07. 직관, 여섯번째 창조의 눈


'직감'은 뭔가 자신의 주변에 변화가 오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직관'은 엄청난 이성의 힘과 감성의 힘, 그리고 날카로운 오감이 합쳐져서 발휘되는 능력이다. 이성과 감성, 오감 위에 존재하는 최고의 지혜가 바로 직관이다. 그냥 느낌으로 알아내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직관은 그냥 배워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이성, 특별한 감성, 놀라운 오감을 키우는 게 우선이다.


'본능'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지만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가진 생존을 위한 기본 능력이다. 뭔가 위험한 것이 날라오면 눈을 감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저도 모르게 먹을 것을 찾는 게 그런 것이다.


직관은 생각 너머의 생각이다.

직관은 통합적으로 인지하여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직관을 '여섯번째 창조의 눈'이라고 한다.


'통합적 인지'는 모든 감각과 이성, 감성적 능력을 종합하여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실제로 통합적 인지는 하나의 감각이 만들어 내는 인지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오히려 감각으로 통하적 인지를 설명한다면 한 번에 인식되는 여러 겹의 다차원적 공감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공감각은 사실 어린아이들에게 더 특별하게 나타난다.

눈으로 본 것을 맛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맛을 소리로 표현하기도 한다. 청음에 소질이 있는 아이에게 들은 것을 악보가 아닌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시 그것을 음악으로 바꿔 보라고 해도 곧잘 음악으로 표현한다. 소리와 그림을 구분 없이 넘나들며 변화시켜 인식할 수 있다는 애기다.


공감각이 작동되는 것은 오감, 이성, 감성,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언어와 이미지가 마치 어둠 속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이 들어오듯이 동시에 밝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의 제조사나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회사는 UI의 사용 편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직관적 UI'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들이 강조하는 직관의 의미에는 '하나씩 모두 배우지 않더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표하고 있다.


아이폰의 화면 설계와 홈 버튼을 살펴보자.

화면을 책장 넘기듯이 넘기고, 가방에 무엇인가를 넣듯이 아이콘을 결합한다. 홈버튼은 더 간단하다. 메인으로 이동하고, 화면을 활성화하고, 응용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다른 명령을 실행하는 데도 이 버튼 하나를 사용한다. 사용자는 그저 몇 번 넘겨보고 눌러봄으로써 대부분 기능을 익힐 수 있다. 그 다음부터는 이 버튼의 여러 가지 기능을 생각하며 사용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머리가 아닌 몸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직관적'이라고 표현한다. 그 크기는 다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직관'과 같은 의미다.



직관을 키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전제 조건, 이성을 키우는 일

이성을 키운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이든 과학이든 문학이든 역사든 자신의 지적 지평을 넓히는 데 요구되는 기본적인 소양을 넓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부족하다면 직관의 싹은 자랄 수 없다.


두번째 전제 조건, 언어와 이미지의 파이를 키우는 일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를 표현하는 것과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또한, 안다는 것이 언어와 이미지를 매개로 저장되는 것이지만, 표현하고 상상하는 도구 역시 언어와 이미지라는 사실은 더더욱 중요하다. 


베토벤의 음악을 생각해보자.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 세계를 악보로 남겼다. 그는 음악의 언어이자 이미지인 악보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남겼다. 하지만 그 음악에 대한 해석의 크기는 너무나 다르다. 악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악보는 그냥 이해할 수 없는 그림 한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천재가 남긴 놀라운 예술 작품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을 피아니스트나 오케스트라에 해석해 달라고 말해 보라. 그들의 언어인 연주는 또 다른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언어와 이미지의 세계가 너무 좁거나, 왜곡되어 있거나, 마치 색안경처럼 한 가지 색으로만 덮여 있다고 가정해 보라. 베토벤이 만들었던 직관의 세계에 다가설 수 있을까?


세 번째 전제 조건, '왜'라는 의문과, '어떻게'라는 다른 차원의 의문과, '그래서'라는 또 다른 차원의 의문하기

이성, 그리고 언어와 이미지 파이가 커졌다면 '왜'라는 의문과, '어떻게'라는 다른 차원의 의문과, '그래서'라는 또 다른 차원의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의문은 이성도 키우지만 주로 감성과 오감을 키운다.


'왜'라는 의문이 왜 중요할까?

만약 오감이 인지하는 세계를 그냥 존재하는 세계라고 무감각하게 인지하거나 무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피카소가 지나는 길에 본 고물 자전거를 '쓰레기구나!'라고 인지하거나 '고물 자전거구나!'라고 인지하는 데서 끝났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왜 저것이 저기에 있을까?'라는 의문의 눈으로 자전거를 들여다보았다. 이어 그의 눈에 '황소의 머리'가 보인 것이다.

'왜'라는 의문은 이렇게 창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구글은 창조적인 조직 문화로 유명하다.

하루는 신입사원 면접을 보는데, 한 지원자가 자신은 "인공위성을 전공했는데 여기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공위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때 구글의 임원은 채용해 줄 테니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를 만들어 보라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색과 인공위성을 결합한 구글 어스가 탄생했다.

이 지원자는 '왜' 구글에서 인공위성을 전공한 사람이 일하면 안 되는지 스스로 의문을 던졌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냈다.


'어떻게'는 한 차원 높은 의문이다.

이 의문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성의 추론으로 보지 못한 세계를 인식하도록 해준다. 그렇지만 '어떻게'라는 것은 이성의 인식 수준에서 말하는 계량화나 분류와는 다르다. 계량화나 분류하는 방법은 기존의 세계에 편입시키는 방법인데 반해 '어떻게'라는 의문은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똑똑하다'라는 관점으로 어떤 사람을 인식한다면, 이성으로는 '얼마나 똑똑한가'를 계량화하려고 하겠지만, 이 수준에서는 '어떻게 똑똑한가'를 인식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똑똑한가'를 계량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떻게'라는 언어가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시작과 끝이 개방된 다양성과 다원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떻게'는 한 차원 높은 창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래서'는 무엇일까?

'왜'와 '어떻게'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다르게 보기)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사고의 전환(다르게 생각하기)을 의미한다. 그리고 '왜'와 '어떻게'가 인식된 세계의 본질을 찾는 과정이라면, '그래서'는 찾은 본질에 대한 고찰이자 새로운 대안을 찾는 과정이다.



자동차 제조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철과 이토록 많은 철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1단계 '왜'라는 의문으로 본질 찾기 시작

'왜 자동차의 재료가 대부분 철일까?'라는 의문으로 시작된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가정이 생기고 그것을 검증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철은 충격에 강하고, 때로는 큰 충격에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충격을 흡수하기도 한다.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다.


2단계 '어떻게'라는 의문으로 새로운 관점(다양한 관점)으로 본질 찾기

'철은 어떻게 공급되는가?' 철은 보통 강판의 형태로 공급된다.


2-1단계 추가적인 '어떻게'라는 의문으로 새로운 관점(다양한 관점)으로 본질 찾기

'이 강판으로 어떻게 자동차를 만드는가?'하는 의문이 이어진다.

자동차의 사용 기간과 소비자의 취향을 고려해서 도금이나 페인팅 기술도 접목되어야 하고, 절단과 프레스 기술도 접목된다.


3단계 인식된 대상(사물)에 대한 본질이 이해되는 단계에 이른다, 철에 대한 본질이 이해된다.


4단계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의 깊이와 폭이 커지고, 그 폭과 깊이가 커질수록 더 많은 '왜'와 '어떻게'가 만들어지고 해결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5단계 '그래서'라는 의문으로 본질에 대한 의문과 새로운 대안 찾기

'그래서 철은 이런 모든 조건에서 최상의 선택일까?'하는 재료로서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시작된다.

'그래서 철이 자동차의 무게를 증가시켜서 연료 소비를 증가시키지는 않는가?' 자동차 재료로서의 본질적인 의문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탐색이 필수적이다. 여기가 사고의 전환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5-1단계 새로운 대안(대체재) 만들기, 기존의 방법을 혁신할 방법 만들기

1) 새로운 대안(대체재) : 철의 대안을 찾아내는 것, 알루미늄

새로운 대안은 대체제를 의미하므로 알류미늄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알루미늄은 재료비가 더 들지만 충분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고, 차제가 가벼워져 연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원가가 올라가니 모든 차종에 적용하기보다는 고급 차종부터 적용하는 방법이 적절할 것이라는 결론이 추론된다. 차체 일부에만 적용할 수도 있다.


2) 기존의 방법을 혁신할 방법(다르게 쓰는 방법) : 철을 사용하되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것, 철과 다른 재료를 섞어서 합금을 만드는 방법

이 방법을 통해 모든 조건에서 철보다 유리한 재료를 찾기 쉽지 않겠지만, 적용 가능한 대안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세 가지 차원의 의문은 인식의 차원을 넘어 새로움을 창조하는 사고의 전환을 만들어 낸다.


직관은 여러 단계의 '의문'에 대한 '해결'을 반복함으로서 생기는 것일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오감과 감성이 커질 수는 없다. 직관을 키우려면 여기에 반드시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것이 되어보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이성뿐만 아니라  오감과 감성으로 종합적으로 이해해 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철이 되어보지 않고 철을 그냥 사유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이성의 테두리, 즉 과거에 갇히고 만다. 이 테두리를 뚫고 나와야 비로소 직관의 싹은 자라기 시작한다.


'생각하는 사람'도 이렇게 탄생했다.

로댕은 자신이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 감성적이고 오감적인 이해를 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점토로 형을 뜨기 전에 조각의 대상을 여러 번 그리는 작업을 했다.

왜 그랬을까? 로댕은 그 작업을 통해서 작품의 중간 모습이나 완성된 작품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한다는 것, 눈으로 본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작업하는 손의 느낌을 알아낸다는 것,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작업이 조각을 그려보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작업하고자 하는 인체의 모든 부분을 자신의 인체로 이해하려는 작업 중의 하나가 작업 대상을 손으로 그리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을 머리로 '아는 것'이 이성의 수준이라면, 자신이 조각하고자 하는 대상을 자신의 몸이 '이해하는 것'은 오감과 감성의 수준이었다. 로댕은 작업하는 자신을 머리와 손만을 사용하는 작업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작업하는 대상을 이해하려 했고, 심지어는 그 작품이 되려고했다. 로댕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체가 가지고 있는 선들을 통합해서 나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7장(직관) 정리

직관은 창조적인 능력이 커진 사람, 이를테면 현자에게서 드러나는 놀라운 특성이다. 논리적인 설명에 다다르기 이전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진실에 대한 해답'이 직관이다. 



08. 학습, 미래를 비추는 거울


모르는 것에 대한 탐닉은 현자의 일상이다.


창조적 천재들에게서 자존심과 믿음이 느껴지는 이유?

스스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지도 스스로 계속 만들고 있다. 특히 그 믿음, 그것은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다.


로댕은 조각을 그냥 작품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게 남들과의 차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했다.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신뢰이기도 했다.


자존심과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이 만든 세계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수학과 과학을 너무나 좋아했고 아주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 주었다.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하기도 했고, 지구가 음직인다는 사실을 설명하다가 로마로 붙잡혀 가서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책은 금서가 돼서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만큼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걸기도 했다.


로댕, 뒤샹, 갈릴레이가 보여준것은 '창조성'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스스로 행동으로 증명했다.

다른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쏟아 부어야 하는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들은 그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꿈을 이루었다. 행복은 보너스였다.


묻는다는 것은 지금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더 빨리 진실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지금 묻지 않는다는 것은 배울 준비가 안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모르고 있다는 게 아니라, 모르고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모르고 있으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다. 묻지 않는다면 배울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죽을 때까지 묻고 배워도 모르는 게 더 많은데 물을 게 없어질 것이라는 걱정보다는 무식한 채로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한다.


오로지 학습만이 미래를 만든다.

나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배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어떻게든 배워야 한다. 그리고 배움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꿈'이다. '꿈'은 나의 미래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꿈'이 있어야 배움도 있는 것이고, 그 배움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통도 행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럼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라.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당신의 꿈이 아니거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꿈'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 그 꿈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혹시 그 꿈을 나의 바깥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자기 파멸을 불러온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오산이다. 은행은 주로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 가난한 사람이 돈을 빌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꿈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이룰 수 있는 것이 꿈이다. 그러니까 '꿈'인 것이다. 누구나 이룰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꿈은 지금은 현실이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는 믿음으로 행동이 만들어지고, 그 행동으로 진짜 그렇게 되는 미래의 현실인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꿈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매일 확인하고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김밥을 팔아서 성공한 김승호라는 CEO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일생이 꿈도 있지만 매년 이루어야 할 작은 꿈의 기록을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본다'고 했다. 그것은 꿈의 목록이 아니라 큰 꿈을 만들어 가는 중간 목표이자 점검표였다.


꿈은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커다란 거인을 세상에 드러내는 작업이다.

꿈이 있다고 하면 그 거인을 무슨 방법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할 것인가? 일단 중요한 두가지는 알았다.

하나는 '자신의 꿈을 항상 생각하고 그 꿈을 긍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정을 갖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노력은 학습의 과정이고, 학습만이 그 길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꿈에 이르는 길을 생각해 보자.


가장 먼저 할 일은 '꿈을 그리는 것'이다.

그린다는 것은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꿈과 꿈의 조각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언어냐 이미지냐는 중요하지 않다. 보이게 만들고, 또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학습을 통한 변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사물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변화의 주체도 자신이고, 변화의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다.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은 변화에 저항한다. 변화와 같은 결정은 고통스러운 결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때로는 마르셀 뒤샹이나 갈릴레이나 앤디 워홀이나 다른 창조적 천재들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노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학습과 노는 것은 서로 반대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둘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논다는 것은 놀라운 창조로 연결되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것이 놀이에서 가능해질까?

논다는 것이 우리를 기존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제한이나 벌칙도 크게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애기다.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도 놀이다. 꿈도 그 중의 하나다. 의지대로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이 꿈의 창조성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자다가 답을 얻는 경우도 한두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재봉틀의 바늘도 구멍 뚫린 창으로 공격받는 꿈이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처럼 노는 것은 우리를 상상의 언덕 너머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그것을 학습으로 활용하려면 두 발은 이성을 단단하게 딛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만든 것 중 단 한 가지도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은 없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인간의 상상력이 존재하는 실재를 만드는 것이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상상할 수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미국의 극작가 폴 호건은 이것을 명쾌하게 정리해 주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한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8장(학습) 정리

'왜 배워야 하는가'와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09. 빛나는 생각의 시작과 끝


조지아 오키프는 꽃 그림을 그렸는데 그녀가 그린 200점도 넘는 그림은 아무리 뒤져봐도 한 그림에 꽃송이 하나를 다 그린 그림이 없다. 그녀는 꽃을 크게 그렸는데, 다른 화가들이 그녀에게 '왜 그렇게 꽃을 크게 그려서 이상하게 보이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럼 당신들은 강을 그리는 화가들이 강을 그릴 때 왜 그렇게 실물보다 작게 그리느냐고 물은 적이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녀는 강이나 산처럼 큰 걸 작게 그리는 것은 이상하지 않고, 작은 꽃을 크게 그리는 건 이상하냐고 되물은 것이다. 아무도 꽃을 그렇게 자세히 보지도 않지만 그것을 그렇게 그리지도 않는다. 우리고 보고 상상하는 세계는 아주 큰 세게부터 아주 정밀한 세계까지 무한하다.


에디슨은 삶의 끝 지점에서 비밀스런 고백을 했다.

'아이디어는 우주에서 온다. 놀랍고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아이디어는 우주 밖에서도 온다.'


마지막으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왜 이런 창조적인 일들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나다워지기 위해서이다. 창조적인 상상, 창조적인 과정, 실패, 그리고 꿈을 이루는 것. 이 모든 것의 중심에 행복이 있다. 


과학자이면서 글을 아주 잘 쓰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꾼 꿈 이야기

어느날 아이작 아시모프는 꿈을 꿨는데, 죽어서 천국에 갔다. 옆에 베드로가 보이길래, 그는 '나는 무신론자라서 천국에 올 리가 없는데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그것은 하느님이 일이니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하나만 애기하라고 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대답했다. '타이프라이터' 그리고는 꿈에서 깼다.


왜 아시모프는 타이프라이터를 달라고 했을까? 그것은 행복이었다.

새로운 글을 쓰는 일이 글에게는 힘겨운 작업이기도 했지만 반면에 가장 행복한 작업이기도 했던 것이다.



9장(빛나는 생각의 시작과 끝) 정리

창조적인 생각이 결국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 줄 것이다. "새로움을 통해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다."



에필로그. 빛나는 생각을 넘어서


우리의 생각은 새로움을 갈망한다.

새로운 옷을 찾고, 멀쩡하게돌아가는 시계를 갖고도 새로운 시계를 갖고 싶어 한다. 놀라운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도 더놀라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새로움을 갈망한다. 이성도, 감성도, 심지어는 감각도 그렇다. 이들을 연결하고 강화하는 언어와 이미지조차도 새로움을 갈망한다. 새롭지 않으면 감옥에 갇히듯이 과거에 갇히고, 느린 속도지만 곧바로 퇴화하기 시작한다.


피부는 새로운 것을 중심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의 무게에 대해 거의 느끼지 못한다. 시각도 그렇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작은 메모리 스틱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이유가 새롭지 않은 것들에 무디게 반응하는 감각의 특성 때문이다.


이성이나 감성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변화에 대해서도 '그냥 흘러가는 것 중의 하나'라고 판단한다. 이렇게 이성과 감성은 살아있는 채로 서서히 죽음에 이른다.


'우리의 생각은 새로움을 갈망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무엇일까?

생각이 추구하는 새로움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내재된 과거의 인식과 결합하여 또 다른 갈망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것이 생각의 진화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건 행복이다. 새로움을 통해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다.


그렇다면 새로움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예민한 감각, 예리한 이성, 섬세한 감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세 가지를 항상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일차적인 노력을 통해 쉽게 최고의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이 감각이다.


미국의 최고의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프랑스의 대작가 빅토르 위고는 알몸으로 글을 쓸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서서 글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글을 쓰기 전에 연필을 아주 뾰족하게 갈았다. 서서 글을 쓰는 것과 연필을 뾰족하게 가는 것이 헤밍웨이에게 왜 필요했을까? 헤밍웨이가 연필을 다듬는 것이 과연 '연필을 다듬는 것' 그 자체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

시끄러운 파티를 즐기기로 유명했던, 미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시인 하트 크레인은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파티장을 빠져나와 타이프라이터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음악을 들으며 시를 썼다. 영국의 시인 새뮤얼 존슨은 한자리에서 25잔의 차를 마셨고,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파름의 수도원'을 쓰는 동안 아침마다 프랑스 법전 두세 페이지를 읽었다. 색을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뒤마는 시는 노란색 종이에, 소설은 푸른색 종이에, 산문은 장밋빛 종이에 썼다. 


과연 이들이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을 다듬는 일이었고, 예민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몸은 불필요한 것들까지 발달하도록 진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감각을 극한의 상태에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감각이 동시에 예민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몇 가지 감각을 주감각으로 하여 나머지를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벤저민 프랭클린, 빅토르 위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촉각을, 하트 크레인은 청각을, 새뮤얼 존슨은 미각을, 스탕달과 알렉산드르 뒤마는 시각을 다듬어 사용했다.


감각을 다듬었다면 이제 감각은 이성과 감성을 깨워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성과 감성은 과거의 경험과 학습의 죄로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 문을 열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과 학습에 비해 새로운 것이 전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성과 감성에 다다르기 전에 경험과 학습의 잣대에 의해 감각은 정리되고 편집된다. 어떤 것들은 철저하게 무시되기도 한다. 이렇게 작동하는 감각기관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원하지 않는 육체의 일부분인 것이 그 이유다. 육체는 새로운 진실이나 꿈을 쫓지 않는다. 육체는 오로지 생존만을 추구한다. 육체는 감각에 의해 포착된 세계를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위협인지로만 판단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판단이 내려진 것에는 무심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을 포착한 때도 마찬가지다. 조금 다른 점들이 발견된다 해도 감각은 무심히 흘려보낸다.


'감각의 무감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현상을 깰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뇌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성이고 감성이다. 감각이 이성과 감성을 자극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할 방법이 이성과 감성에 숨어있다.



감옥을 탈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밖에서 문을 열어서 나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감옥을 빠져 나오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인 새로운 감각을 통해 감옥 문을 여는 방법은 우리가 모두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만 우리가 이해한 대로 놀라울 정도로 새롭지 않다면 감각 대부분은 편집되고 무시되고 검열당한다.


두 번째 방법은 감옥 안에서 예리한 이성과 감성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감옥 문의 창살을 자를 정도의 예리한 도구로 이성과 감성을 다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성과 감성은 편집하지 말 것을, 무시하지 말 것을, 검열하지 말 것을 명령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성이 예리해진다는 것은 감성이 섬세해진다는 것이고, 감각이 예해진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생각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면 생각의 감옥을 나와야 한다.

첫 번째 방법은 절대로 감옥 문을 여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두 번째 방법만이 현실에서 가능한 방법이고, 항상 가능한 방법이다.

이제 감각이 원하는, 아니 이성이 원하는, 그리고 감성이 원하는 새로움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 보자.



이 책에 등장하는 놀라운 인물들(예술가를 중심으로)

롤프 옌센, 앙리 마티즈, 앤디 워홀(수프 깡통, 두개의 메릴린, 자화상), 에두아르도 칠리다, 재니퍼 존스, 조지아 오키프


---------------------------------------------------


우리의 생각은 곧 우리의 미래다. 생각이 행동으로 모두 이어지지는 않지만, 생각이 없으면 행동은 불가능하다. 그 '생각'을 조금 더 '창조적' 이게 만들어서 한 번 사는 삶을 자신의 '색깔' 을 내는 데 활용하자. 이것이 행복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스스로 생각의 주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다. 내가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태는 아닌지 생각해 보고, '아는 것'을 행동할 줄 아는 '이해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반응형

'영양분 > 읽은 책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0) 2013.01.27
하이디어로 세상을 사로잡아라  (0) 2013.01.27
인문학 공부법, 독서에 대해서  (0) 2013.01.27
질문이 답을 바꾼다  (0) 2013.01.27
모방의 힘  (1) 2013.01.27